[멸종위기동물 백과사전] 동굴 무너져 겨울잠 잘 곳 필요한 붉은 박쥐가 대신 들어간 곳

천연기념물 제452호·국내 멸종위기 Ⅰ급
서식지인 동굴 파괴되자 인간이 버린 폐광 들어가

  • 기사입력 2020.09.24 17:14
  • 기자명 고명훈 기자
(사진=국립생태원 공식 블로그 갈무리)
(사진=국립생태원 공식 블로그 갈무리)

어두운 동굴 속에서도 유난히 밝은 빛을 뿜어내는 동물이 있다. ‘오렌지윗수염박쥐’라고도 불리는 붉은 박쥐가 그 주인공이다. 우리에게는 ‘황금 박쥐’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박쥐라 하면 흔히 시커먼 색을 떠올리기 쉬운데 이 친구는 주황빛을 띠는 몸에 양털같은 털이 소복소복 박혀있다. 눈은 뜬 건지, 감은 건지 구분이 안 갈 정도로 작고, 툭 튀어나온 콧구멍에 유독 시선이 간다.

박쥐목 애기박쥐과에 속하는 붉은 박쥐는 몸 길이 5cm 정도의 작은 체구를 하고 있다. 몸은 작아도 남들이 잠 드는 밤에 쉴새 없이 활동하는 체력왕이다. 5마리 정도 무리를 이루며 이쪽 저쪽 날아가 곤충들을 잡아 먹는다.

이 체력을 위해서 붉은 박쥐는 겨울철, 긴 동면에 취해야 한다. 11월에서 이듬해 3월까지 약 220일 동안 자연동굴이나 폐광에 자리를 마련하고 꿈나라로 들어간다. 주로 나뭇가지 끝이나 나뭇잎에 거꾸로 겨울잠을 잔다.

붉은 박쥐는 세상에서 가장 오래 사는 포유류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최근 국내 연구진이 붉은 박쥐의 DNA시료를 얻어 게놈 해독을 실시한 적이 있다. 그 결과, 붉은 박쥐에는 비소 저항성 유전자 변이가 있는 것을 확인했다.

비소는 반도체 화합물을 만드는 데도 사용되는 준금속 고체다. 비소 화합물을 이용해 살충제나 방부제를 만들 정도로 독성이 강하다. 이 때문에 붉은 박쥐는 중금속으로 오염된 동굴 환경에서도 생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연구진은 이를 통해 인간 수명과 질병에 관한 중요한 단서를 찾고 있다.

이토록 귀한 아이지만, 안타깝게도 붉은 박쥐는 현재 우리나라에서 450~500마리 개체밖에 확인되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국내 천연기념물 제452호에 지정돼있기도 한 붉은 박쥐는 2012년 환경부에서 정한 멸종위기 야생생물 리스트에도 Ⅰ급으로 지정돼 있다. 세계자연보전연맹(IUCN) 적색목록에서도 ‘취약(VU)’종으로 분류돼 보호받고 있다.

생존에 겨울잠이 필수요건인 붉은 박쥐에게는 주로 12~13도의 온도에, 90% 이상의 습도가 유지되는 곳이 필요하다. 그 안락한 장소가 바로 동굴이다. 무분별한 개발을 일삼는 인간의 손길이 동굴에 닿으면서 박쥐들이 겨울잠을 잘 수 있는 소중한 공간을 잃게 됐다.

그래서 이 아이들이 동굴 대신 찾아낸 장소가 폐광이다. 폐광은 내부의 온도와 습도가 일정하게 유지돼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시원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이따금씩 충북 진천, 경남 통영 등의 폐광에서 붉은 박쥐가 출연한 소식들이 들려오곤 한다.

점점 모습이 사라지는 붉은 박쥐가 국내에서 발견되고 있다는 소식은 반갑다. 붉은 박쥐가 아무리 중금속 등 독성 물질에 강한 유전자적 조건을 갖고 있다지만 살만한 곳을 찾다, 찾다 못해 온갖 유해 물질 가득한 폐광까지 들어온 것이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인간 때문에 집에서 쫓겨나 결국 인간이 버리고 간 폐광을 선택한 아이들이다.

환경경찰뉴스 고명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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